음악 외교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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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솔솔~, 솔솔~ 미미~
 
도레미송이 아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주제곡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ß II; 1825. 10. 25.~1899. 6. 3.)가 작곡한 이 곡의 원조는 라장조이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장조로 불러보았다.
 
다장조 삼화음은 그대로 읊으면 도미솔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이 곡은 아무라도 작곡할 수 있을 것 같은, 또 여러 음악에 사용된 멜로디다.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면 어김없이 거쳐 가는 바이엘, 체르니 연습곡에도 나오는 이 단순한 삼화음의 구조가 슈트라우스를 만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왈츠의 주제음악이 된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친구인 브람스(Johannes Brahms)는 여성들이 사교계 모임에 나갈 때 들고 다니는 부채에 오선을 그려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주제곡 가락을 새겨 넣었다. 그러면서 “안타깝게도 내가 먼저 작곡하지 못했다.”라고 써서 슈트라우스의 곡을 높이 평가했다.
 
슈트라우스의 춤곡들은 19세기 대중음악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른바 비엔나 클래식의 트로이카라 일컫는 ‘하이든ㆍ모차르트ㆍ베토벤’이 세상을 뜬 뒤 다시 한 번 비엔나의 음악 역사를 빛나게 했다.
 
세상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왈츠의 왕’이라 부르고, 그의 두 형제 요제프와 에두아르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를 한데 통틀어 “슈트라우스 왕조”라고 말한다
 
장남 슈트라우스 2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아버지 슈트라우스 1세는 호프집 아들로 태어나 인쇄 공장에서 일하면서 취미 삼아 바이올린을 배웠다. 친구 란너(Josef Lanner)와 팀을 이뤄 술집에서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좋은 결과를 가져와 상업적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이후 바이올린 연주뿐만 아니라 지휘를 직접 하고 춤곡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란너와 함께 비엔나 왈츠의 틀을 완성했고 황실 무도회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1848년에는 그의 불후의 명곡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했다. 이 곡은 세계적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어릴 때 학교에서 운동회 하는 날 운동장을 퍼져 울렸던 음악으로 우리 귀에 익숙할 것이다. 특히 비엔나 신년 음악회의 앙코르 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인 안나와의 슬하에 자녀 일곱을 두었으나 넷 아이를 일찍 잃었다. 그 첫째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이 자신과 다르게 공무원과 같은 안정된 직업을 갖기를 원해서 공부하는 데 집중케 하고 음악은 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부인 안나는 남편이 언제나 연주회를 다니느라 바깥생활이 많은 틈을 타 큰아들의 음악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몰래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어렸을 적부터 가정에 소홀한 아버지에게 반감을 가진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바람피워 살림까지 차리자, 학교 다니기를 그만두고 음악에 몰두했다.
 
1884년 슈트라우스가 19세가 되던 해 집안의 생계가 어려워져 어머니와 두 동생을 위해, 아버지 몰래 히찡의 ‘돔마이어 카지노’라는 식당에서 자작곡으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이때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가 터지도록 좋은 결과를 가졌으며, 이것이 그의 초연이고 데뷔였다. 청중들의 계속되는 요청에 따라 하나의 곡으로 앙코르 연주를 열아홉 번이나 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신문에서는 “구테 나흐트, 란너! 구텐 아벤트 슈트라우스 1세! 구텐 모르겐 슈트라우스 2세!” 라고 호평했다. ‘구세대 란너와 슈트라우스 1세가 지는 해라면 슈트라우스 2세는 뜨는 해’라는 뜻이다.
 
이렇듯,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와 같은 장르음악에서 대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1849년 슈트라우스 1세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마침내 아버지의 오케스트라를 넘겨받아 하나의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로 통합했다.
 
삼형제의 가족 사업
사교계에 슈트라우스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고 초청 연주회가 늘어나 사실상 홀로 작곡하면서 모든 연주를 지휘하는 일이 벅찰 만큼 되었다. 그는 어린 두 동생에게 이 사업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두 살 아래의 요제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해 공업용 장비를 생산하는 일을 하였고, 열 살 아래의 에두아르트는 원래 음악을 좋아해서 형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에두아르트에게 지휘를 맡기고서 작곡하는 일에 전념했다. 차차로 형제들이 왈츠 작곡에 참여하여 삼형제가 지휘와 작곡을 서로 도와가며 슈트라우스 왕조를 발전시켜 나갔다.
 
히포콘드리아(Hypochondria) 슈트라우스, 그리고 세 번의 결혼
12월 31일에 우리나라에서 보신각종이 울리듯이, 비엔나에서는 왈츠 곡이 울려 퍼져 집에 있던 사람들 모두 일어나 왈츠에 맞춰 춤을 춘다. 한 해의 마지막을 기분 좋게 보내고 새해를 기쁘게 맞이하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새해를 맞아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왈츠의 작곡가 슈트라우스 2세는 성격이 그러함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굉장히 겁 많은 사람으로, 기차가 터널을 지나는 것을 무서워하고 집에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히포콘드리아(Hypochondria)는 한국어로 ‘건강 염려증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하인이 감기 걸리면 자신이 폐렴 걸린 게 아닌가.’ 하고 걱정과 공포에 휩싸이는 증후군이다.
 
그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는 모든 소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친구가 많지 않았다. 햇볕이 밝은 날에는 작곡을 할 수 없다고 불평을 터트렸고, 비가 종일 오는 날씨를 좋아하는가 하면, 카드게임을 즐기는 가운데 승부욕에 매우 집착했다.
 
이런 슈트라우스에게 언제나 어머니는 정신적 지주로서 존재했다. 1862년 서른아홉의 나이에 성악가 헨리에테 트레프츠(Jetty; 예티)와 결혼을 했다. 7살 연상인 예티는 이미 두 자녀를 둔 기혼녀였고 슈트라우스 2세가 음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해서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1870년 어머니가 죽고, 슈트라우스는 아내 예티에게 어머니와 다름없이 의지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1878년 예티마저 세상을 뜨자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25살 연하의 연극배우 릴리 디트리히와 재혼했다. 릴리는 당시 극장 감독과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작 슈트라우스 2세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결혼하고 4년이 지나 더 이상 부부의 연을 할 수 없어 이혼을 결심했다. 오스트리아가 대단히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인지라 국왕까지 나서서 이들의 이혼을 반대했다. 결국 슈트라우스는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 바이언 지방의 코부르크로 가서 개신교로 개종한 뒤 1882년 세 번째의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스물여섯 살의 미망인이었던 아델레는 슈트라우스가 오페레타 작곡에 온 힘을 쏟을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 뒷바라지해 주었다.
 
여자를 어머니의 대체품으로 여겼던 슈트라우스는 세 번의 결혼생활에서 자식 하나 없이 살다가 1899년 6월 3일 폐렴으로 아델레 품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슈트라우스 2세의 장례와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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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중앙묘지내 음악가 묘지의 요한 슈트라우스의 묘

슈트라우스 2세는 개신교로 개종한 까닭에 슈테판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르지 않고 비엔나 1구 도로테아가쎄에 위치한 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본 후 6월 7일 중앙묘지에 안치됐다.
 
1921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시립공원의 중앙 꽃밭에 슈트라우스 2세가 바이올린으로 왈츠를 연주하는 기념상을 세웠다. 그 후 1960년에는 오스트리아 화폐 100실링에 그의 초상이 실렸다.
 
기사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 윤보라기자 Bora Y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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