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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지휘자. 20세기의 가장유명한
음악가.20세기
클래식음악의 상업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 등 그에게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너무도 많다.
자기현시욕과 재물욕이유난히
강했던 기회주의자라고 공격하거나 20세
기후반 음악의 몰개성화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카라얀은누구보다도
매체의 엄청난 파급효과를 잘 알고 그것을충분하게 이용하고 활용했던 인물이었다.
LP가스테레오로 변환했을
때, CD가 처음 등장했을 때, 누구보다도제일
먼저 그 매체를 활용했던"앞선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베를린 필하모니커라는 최고의 악단을30년 이상이끌어오면서 높은
완성도의 음반들을 양산해 고전음악의 저변이 확대된 결과를 낳았고,그의
연주중에는 명연주들이
즐비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또한 카라얀은명장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레너드 번스타인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카리스마를 이끈 인물이었다.
카라얀의 생애 카라얀은 1908년 4월 5일 일요일에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모차르트이후 잘츠부르크에서
또 한 명의음악의
위인이 탄생한 날인 것이다.
카라얀의조상은 그리스
출신이었지만 오스트리아에 정착하여 귀족의 칭호까지 얻게 되어서 카라얀가의 성에는 귀족 앞에만 붙은von이 보태진다.
유년 시절카라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인물은 바로 그의 형이었다.카라얀
은유난히 작은 몸집이었기에 큰 덩치의 형에게 항상 열등감을 가졌으며 음악을 시작한 계기도 형에게 피아노를 뒤지지 않겠다는 단순한 경쟁의식에서 시작된다.
그가 스스로인터뷰에서
털어놓았듯이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를 사귀기 힘들어하는 성격이었으며 누구에게도 자기의 본심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의고독감은
바로 음악에 몰입하게 만든다.
14세때는여름방학동안 영국으로
가서 3개월간머물며
영어를 막힘 없이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고 음악교육과 학교공부를 병행하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비록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카라얀은 형을 따라 공대에 입학했는데 결국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반면 형은 후에 공학 교수로 이름을 날릴 만큼 성공하게 된다. 카라얀이 쉽게 공학을 포기한 것도 그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이 부족함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분야에서도 성공을거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차 8세부터 10년
동안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음악원의 은사였던 파움가르트너(Bernhard Paumgartner)의 조언으로 마침내
지휘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1929년까지 1년 반동안빈에서
집중적으로 지휘 공부를 하게 된다.
당시 빈국립가극장의
건물 관리자 겸 감독관이었던 사람이
바로 카라얀의 숙부였다. 이숙부는
조카인 헤르베르트에게 유명한 지휘자의 연주회나 비공개 연습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국립가극장에는 수석지휘자인
브루크너의 제자 프란츠 샬크, 리하르트슈트르우스, 펠릭스바인가르트너, 빌헬름푸르트벵글러, 클레멘스크라우스 등이 지휘대에 올랐기 때문에 지휘 공부중인 카라얀으로서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928년 12월 27일분델러 교수
클라스 연주회에서 로시니의 "윌리엄 텔"서곡을 지휘하게 된다.
빈 아카데미를졸업한
카라얀은 부픈 가슴을 안고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가족과 파움가르트너 등 지인들을 총동원해1929년 1월 22일
모차르트테움 대강당에서 데뷔 연주회를 열게 된다.
아직 만 21세도 채되지않은
지휘자가 이날 택한 곡목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5번,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3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교향시 "돈환"이었다. 이
날공연을 지켜보던 독일 우름(Ulm)시립극장의 지배인디트리히는 카라얀의 재능을 인정하여 연습지휘자의 자격으로 카라얀을 우름에 채용한다.
지방의 허름한오페라
극장의 악조건은 카라얀으로 하여금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기르게 해주었다.우름에
취임한 3개월
후인 1929년 5월에 그는
빈으로 가서 국립가극장에서 토스카니니가 이끄는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의 초청공연을 듣는다.
작품은 베르디의 "팔스타프"와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였으며, 당시최고의
전성기에 있던 토스카니니는 카라얀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된다.또한
여름휴가기간엔 잘츠부르크 음악제을 참관하여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의 음악을 피부로 접하게 된다.
또한 1930년부터 2년간토스카니니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 초대되어 바그너의 오페라를 지휘하게 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카라얀은 자전거를 타고 바이로이트로 가서 이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다시 한번토스카니니가
카라얀에게 끼쳤을 영향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토스카니니가
지휘한 <팔스타프>와 <람메르무어의루치아>를들으며 평범해 보이는 선율의 세부를 약간 바꾸는 것만으로도 곡의 전체적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배웠다.
카라얀의 토스카니니에대한
존경은 그의 음악적 스타일을 따르는 방식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카라얀은 토스카니니를 통해 지휘가 지닌 힘과 마력을 깨우쳤던 것 같다.
1930년대초부터 독일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1933년 4월 8일, 독일에 거주하는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가 시작된지1주일후, 카라얀은나치에 입당하게 되고 바로 같은 해 5월 1일, 두 번째로
나치에 입당 절차를 밟는다.
카라얀의공식적인 입장은2년 뒤인 1935년에 입당한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는 얼마간 연합국의 재판에서 형이 가벼워지기 위한 술책으로 들어났다.
1934년
봄, 카라얀의
우름에서의계약은 종결됐다.당시 독일은수많은 실업자가 있었으며 카라얀도 그 중 하나에불과하게 됐던
것이다. 직업을구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상경한 카라얀은 수개월간을 궁핍하게 지내다가 마침내 아헨(Aachen)에서
제 1지휘자를
모집하는 기회가 온다. 한
지인이 그를아헨 주립극장의 새 지배인에게 소개시켜주게되고 결국 지휘 시연을 할 기회를 잡는다.
결국 초반에나이
많은 단원들이 카라얀이 너무 젋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누군가 카라얀을 강력히 추천하여서 결국 아헨의 교향곡과 오페라 부문의 지휘자가 된다.
그의 나찌경력에대해
카라얀은 이때 아헨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원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입당했노라고 말하지만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미 2년전부터
카라얀은 나찌당원이었다. 더구나당시는 많은
실력 있는 유태인 음악가들이 추방되고 있던 터라 독일내에서 카라얀은 쉽사리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마침내 카라얀은1935년 27세의
나이로 독일내 최연소 음악 총감독에 취임한다.
이후카라얀은 기꺼이
나찌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1938년 7월에 카라얀은아헨에 와서 알게된 미모의 오페레타 가수 엘미 호르가레프와 첫번째로 결혼한다.그녀는
카라얀보다 11년
연상이었고 4년
후카라얀이 두 번 째 결혼한후에도
재혼하지 않는다.
이당시 카라얀은
당대 독일 최고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와 라이벌 관계로 발전되가고 있었는데, 마침내이해 4월 8일 처음으로베를린 필을
지휘하게 된다. 이 첫 만남에서언젠가
이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카라얀은 키웠다고 한다. 또한이때부터
독일 그라모폰과 함께 음반작업도 시작한다.카라얀은
리하르트슈트라우스가 참석한 가운데 "엘렉트라"를 연주하는등
지휘자로서 승승장구하게된다.
카라얀은 아헨의수석
지휘자 자리를 그만 두게 되는1942년
이혼녀아니타 귀터만과 재혼하게 된다. 그녀는 카라얀보다 9세 젊고 '4분의 1의 유태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라얀은후에
이 이유로 해서
나치당에서 탈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카라얀은끝까지
나치당원이었다는 자료가 남아있다.좀
더정확한진실은 그가 전시 중 제국의 노선에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집명령을 받게 되었다가, 국립가극장의지휘로만
활동이 제한되어 종전까지 활동이 뜸해지는 정도다.
이때는 바로
푸르트벵글러가 나찌 정권으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던 때인데 카라얀의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를 카라얀은 종종 와서 어디선가에서 듣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이 보지 않도록 조심해 하면서.그러므로 푸르트벵글러역시 토스카니니 못지 않게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카라얀은베를린
필의 선임자였던 푸르트벵글러와 라이벌일 수밖에 없었다.
카라얀은 나치의
덕으로 출세를 손에 넣었지만1945년 5월
독일이 패망하자오히려 나치의 희생물이 된다. 카라얀
부부는 종전시에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감금된 상태로 지내게 된다. 아내아니타가 통역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카라얀자신은 스코어를 공부하는 것에만 전념한다.
카라얀은 대지휘자로
변신할 준비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전후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아 보지만 같은 해 9월
말 난민수송차에 실려
조국 오스트리아로 보내진다. 연합국측은그가
지휘자로서 활동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일, 이를테면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뒤에서 도와주는 일따위를 하고 있었는데, EMI의
프로듀서월터 레거를 만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음반 녹음을 하기도 한다. 월터
레거는 과감하게 카라얀에게 필하모니아의 지휘를 맡겼던 것이다. 지휘활동금지는 1947년 10월에 해제 되고 빈필과 브루크너의 교향곡8번을지휘하게 된다.
1948년이후, 카라얀은 정력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카라얀은 빈필에
가려 있던 빈심포니를 맡아1953년까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육성한다.
1948년과 이듬해에는
잘츠부르크음악제에 1949년에는 루체른 국제 음악제에도 참석한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1957년까지는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출연하지 않고 빈필과도 관계가 끊긴다. 카라얀을
경원하던 푸르트벵글러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쫓겨난
카라얀은 바이로이트로 옮겨간다. 1950년
여름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해서1951년에는 바그너의"마이스터징거"와 "반지"를, 1952년에는빌란트 바그너가 연출한 "트리스탄과이졸데"를지휘한다. 그러나 이 공연은결과적으로 바이로이트로와 결별하는 단초가 된다. 연출가
빌란트바그너의 새로운 연출에 카라얀이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54년 11월 푸르트벵글러가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드디어 카라얀에게 베를린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기회가 왔다. 푸르트벵글러 생전에
베를린필은 그와 함께 독일의 문화사절단 자격으로 미국 투어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결국 카라얀에게그 기회가 주어지고 카라얀은 이를 무기로 삼아 종신 지휘자로서의 계약을맺어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11월 13일, 베를린필은
만장일치로 카라얀 찬성의 뜻을 표명한다. 정식계약은
성공적인 미국 투어후 1956년 4월에 맺어진다. 카라얀으로서는 남은
인생 전체가 보장되는 중요한 계약 이었다.
바로 이듬해
학생시절 숙부덕에 많은 명지휘자들의 연주를 접할 수 있었던 빈국립가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된다.
그는이미 빈
악우협회의 종신 콘서트 감독이었기 때문에 지휘자로서 유럽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1958년 카라얀은
모델 출신 금발의 프랑스 여성 엘리에트 무레와 세 번 째로 결혼한다. 무레는 카라얀에게
두 딸을 낳아주고
마지막까지 그의 아내로 남는다.
1959년부터는 카라얀/베를린필이 DG와 레코딩 계약을
맺고 녹음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1963년에는전쟁으로
파괴됐던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카라얀의 입김에의해 지휘자가 가장 부각되는 모양의 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빈에서의 그의
권력은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빈이란
도시가 가지는 특수성도 있었고 카라얀의 자기 중심적인 극장운영에도 문제가 있어서 카라얀과 빈국립가극장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결국 1964년, 빈국립가극장의 예술감독직을 내려 놓으면서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겠다는 선언을 한후 빈을 떠난다.
빈을 떠난후
카라얀은 본격적으로 음반과 영상물 제작에 정열을 기울인다. 레코드와
영상물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남고 싶어했던 카라얀은 스테레오(1960년대), 4채널(1970년대), 디지털(1980년대) 등 발전하는
음향 기술과 나란히 반복 녹음을 행하면서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연주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고향잘츠부르크는
카라얀이 빈을 떠나자 그를 환영한다.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의 정열이 집중되면서 카라얀 자신이 모든 음악과 연출을 감독하는 음악제인'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를
탄생시킨다. 바그너의 '발퀴레'가 첫작품으로 상연됐다. 마치 바그너가
그의 작품을 위해 바이로이트 축제를 만들었듯이 카라얀은 그가 꿈꾸어오던 바그너 작품의 공연을 위해 부활제 음악제를 만든 것이다.
이는 그가
남은 여생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열심이었던 레코딩 작업들도 이 축제를 위한 자금원으로 쓰였고 레코딩은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완벽한 리허설 차원에서 공연에 앞서 행해졌다.
카라얀의 이런선
녹음 후공연의 패턴은 그 후 계속된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전곡을 차례차례 잘츠부르크 부활제 음악제에 올린 카라얀은 1970년에
베토벤의"피델리오"를, 그후 계속해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이스터징거",
"로엔그린" 등을 다루었다.이때가 그의 경력에 가장 높은 정점 이었다.
그러나 이음악제는 1976년 10주년 기념의 해에 불협화음이 불거져 나온다.
테너 르네콜로가
카라얀과의 불화로"로엔그린"의 주연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르네 콜로는 이미 EMI에서발매된 "로엔그린"
전곡 음반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바 있었다. 콜로는 카라얀과 예술적인 견해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견해 차이를 대화로 풀지 않고 일방적인 명령으로 처리하는 카라얀의 태도에 만족할 수 없으며 인간적인
유대 없이 노래 부를 수 없다고 했다.
그후 하인리히왕
역의 베이스 가수 카를 리더부슈 역시 음악제 참가를 거부하게 되고 이 두가수와의 신경전에
카라얀은 3개월간병원
신세를 질만큼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때
위험한 척추수술도 받게 되어 이후 그의 활동은 중요한 일로만 제한됐다.
카라얀은 1977년 5월, 13년간 떠나있던
빈의 국립가극장에서 "일 트로바토레"를 공연함으로써 화려하게
돌아온다. 그
후 카라얀은 부활제음악제와
성령강림제 콘서트에서 베를린 필을 지휘하고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빈 필을 지휘하는 정도로만 활동범위를 줄이는데 이는 척추수술 후1978년 9월에 연습중 지휘자용 의자에서 보면대 위에 발을 올려놓고 쉬고 있다가 굴러 떨어져서 2개의신경을 다치게
된 것도 큰
이유가 된다. 이후 그는 걷는 데 불편을 느끼게 된다.
카라얀의 베를린필과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1980년대
초반부터다. 이미 1970년대중반에 당시
베를린 학술 평의원 슈테른이 카라얀에게 오케스트라와 잘되어 가냐고 물었을 때 그는 "녀석들은
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한다. 카라얀은
단원들에게 인자하게 대하였고 협력자로서 충분히 대우해 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가 적이 아니라는 것이 뚜렷할 때에만 한했다.
구시대 지휘자가
그러하듯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의 자율적인 결의를 존중하지 않았고, 교사가
학생을 대하듯 굴욕감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1982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베를린필과 카라얀의28년의 관계를 파탄으로 이끄는 사건이 벌어진다.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당시23세의 여류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를 카라얀이 추천했으나 단원들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더 이상카라얀에게 단원들은
동지요 협력자가 아니었으며 카라얀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결국 사태는
마이어의 채용을1년 동안의
기간에 한해 인정한다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카라얀과 베를린 필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골이 생겨버렸다.
결국, 1989년, 죽기 3개월 전, 그는‘종신’이라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런
사태로 인해서 만년의 카라얀은 베를린 필보다는 빈 필과 더
많은 활동을 갖게 된다. DG에서 만년의 녹음들은 대부분 빈 필과 행해졌으며 1985년 6월 29일,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행해진 교황 요한 바우로2세가 집전한 미사에서 빈 필과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연주하게 되고 그 가 스스로의
영상물을 위해 창설한 텔레몬드리알에 의해 녹화됨은 물론 전세계TV로 중계되기도
했다.
1987년 1월 1일엔
빈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의 나이80이 되는 1988년에는 그의 아내가 음반 표지를 그린100장의 기념음반이 DG에서 기획
되기도 했다. 그 해 4월엔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고 베를린필과 함께 일본, 같은
해 10월엔
마지막 유럽 순회 공연을 떠난다. 1989년 2월에 빈필과
함께한 미국 공연은 그의 마지막 공식 연주가 된다. 그해 7월 16일잘츠부르크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오전
리허설을 끝낸 카라얀은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만년의 카라얀 카라얀의 위대함은
탁월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높은표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연주를 평가해가며 만족스러울 때까지 계속 다듬어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다만 그는 위대한 '장인'이었을지언정 훌륭한 '혁명가'는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20세기 초중반의
후기 낭만파 스타일의 연주를20세기 후반까지
그대로 계승했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새로운 해석을 창조해 낸 경우는 바그너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다.
그의 음악은
후기 낭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고전 레퍼토리보다는 낭만 이 후의 레퍼토리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음반
중에서도 차이콥스키가 가장 큰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마지막
녹음이 된 브루크너 교향곡7번(DG)도
명연 가운데 하나다.그리고
말러교향곡 9번(DG), 브람스 교향곡
1번(DG)도 대표적 명반이다.
역설적일런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지휘자들이
모차르트나 그보다 더 이전 바로크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정격연주로 재해석해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 것도 카라얀
스타일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해석은 1960년대 초이후
사망 전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그가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세워놓고 줄기차게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을 연마시키는데 노력했다는 뜻이다.
그가 죽고
없는 현재의 음악계를 돌아보면 여기저기에서 '혁명가'는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작품의 이상을 향해 매진해 가는 카라얀과 같은 높은 식견을 가진 '장인'이
부족하기에 그의 부재가 더욱 커 보인다.
곽근수의 음악이야기(soun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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